삼국지 경영학, 위대한 영웅들의 천하경영과 용인술. 삼국지를 통해 본 리더십과 경영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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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경영학, 위대한 영웅들의 천하경영과 용인술. 삼국지를 통해 본 리더십과 경영의 진수

by 제주씨블루 2021. 8. 31.

삼국지 경영학

 

■ 좋을 때 버리라”는 말이 있다. 
지금 좋은 것에 매달려 있으면 어느새 낙후되고 만다. 
시대의 흐름을 빨리 보고 지금 재미 보는 사업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의 유망사업을 찾아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는 뜻이다

 

 젊었을 때의 조조를 보고 당시 유명한 명사인 여남사람 허소가
 “당신은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고 난세의 간웅(姦雄)이 될 사람”이란 말을 했다.

 

 난세엔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조조의 인재관

 

 기업은 결국 사람인데 정말 반해서 미치도록 따르는 사람없이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는 것

 

 조조가 그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고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시대에 맞는 시스템을 앞장서서 만들고 정착시킨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전략적 창조성이 매우 풍부하고 실천력이 있었다.

 

 위대한 경영자들의 공통점은 끝없는 에너지와 집념이다.

 

 흔히 조조는 천시(天時)를, 손권은 지리(地利)를 유비는 인화(人和)를 얻었다고말한다.

조조는 타고난 영명함으로 천하대세를 잘 읽어 편승했고,
손권은 물려받은 인재와 강동의 천험을 적절히 살려 수성을 잘했으며,
유비는 아무 가진 것 없이 인재를 잘 써 큰일을 했다.

 

 유비는 적당히 고개를 숙일 줄도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천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지향하는 바와 원칙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이 많으면 소용없는 말이 자연 섞이게 된다. 
또 많은 말을 할 시간도 없다. 말이 적은 대신 핵심을 정확히, 또 명료하게 전달한다. 회의를 하더라도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삼국지' 조조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10가지

 

1. 환관 집안 출신이다.

조조는 원래 한나라 개국공신인 하후영 후손 하후씨 집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식이 없던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같이 조씨가 됐다. 당시 환관과 외척이 정세를 좌우하던 시기였던 터라 조등도 이 사이에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다.

그 덕에 조조는 일찍 출세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환관의 손자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런 집안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조조는 지방 호족들을 끌어들여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2.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출신 상관없이 과감하게 등용했다.

"그대는 어찌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조부까지 3대를 욕했는가?"

"화살이 이미 활을 떠났기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진림 대답에 조조는 웃으며 더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그를 비서관으로 삼았다.

 

3. '계륵'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닭갈비는 먹을 만한 살이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부위다. 결국 이 장소를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돌아갈 결정이 내릴 것이다."

양수 말대로 조조는 다음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다만 조조는 양수에 대해 감히 속마음을 읽은 괘씸죄로 "군율을 어지럽혔다"며 참형에 처했다.

 

4.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

이 사건은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돼 있다. 여백사 가족들이 먼저 조조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으려 해 죽였다는 기록(위서)도 있다. 아예 실존하지 않는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5.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이유는 전염병 때문이다.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 편에서는 "큰 역병이 일어나 관리와 병사들 중에 죽은 자가 많아서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는 구절이 있다. 조조가 패한 핵심 원인은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불은 조조가 스스로 진영에 지르고 물러났다고 나온다. 

 

6. 비록 적이지만 관우를 흠모했다.

조조는 관우를 훌륭한 명장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차례 관우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유비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끝내 조조 밑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조조는 그런 태도마저 훌륭하다며 극찬했다. 여포가 타고 다니던 말 적토마를 관우에게 선물로 준 것도 조조였다

 

7. 여색을 밝혔다.

조조는 여색 때문에 자식을 잃기도 했다. 적장 장제가 죽고 그 미망인을 조조가 억지로 취하자 장제의 조카 장수는 격분해 조조를 암습한다. 이 과정에서 아들 조앙이 죽고 조조는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다. 조앙을 친아들처럼 사랑했던 정부인은 슬퍼하며 조조를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이혼 위기를 맞는다.   

조조는 평생 정실부인 2명과 첩 13명을 두고 그 사이에서 자녀 34명을 낳았다. 부인들 중 절반 정도가 원래 다른 사람 부인이었다.

 

8. 뛰어난 문장가였다.

조조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장수이면서도 시인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당시 백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알려진다. 그 중 하나가 '효리행'이다.

 

9.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조조는 위나라 시조이지만 생전에 황제직에 오른 적이 없다. 원소를 물리치고 서기 207년 중국 대부분 영토를 통일한 조조는 다음해 승상에 오른다. 213년 후한 헌제가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뒤이어 216년 위왕(魏王)에 임명하면서 조조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조조는 아들 조비가 220년 헌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은 후 태조 무황제로 추존된다. 그해 1월 조조는 임종을 맞으며 측근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묘지를 호화롭게 꾸미지 말라." 하지만 조비는 화려하고 웅장한 장례를 치렀고, 이후 도굴을 염려해 무덤 옆 건축물을 철거한다. 

일설에서는 조조가 도굴을 걱정해 가짜무덤을 72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하지만 평소 근검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조 성격에 비추어 보면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10.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나온다.

최근 중국에서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전에는 소설 '삼국연의'를 바탕으로 조조가 악인으로 그려지고 유비-관우-장비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조가 주인공인 대중문화 컨텐츠가 많이 나오는 추세다. 그 중에는 2010년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과 2014년 중화TV 드라마 '조조' 등이 있다.

https://www.wikitree.co.kr/articles/336788

 

'삼국지' 조조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10가지

6. 비록 적이지만 관우를 흠모했다.

www.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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